[김국현 칼럼] 땅끝에서

수필가 김국현(金國鉉)


해남의 땅끝에 적막감이 돈다. 바다와 산과 하늘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 산들바람에 파도는 치지 않고 잔잔한 물결만 인다. 그 흔한 갈매기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다. 이곳은 한반도의 최남단, ‘삼천리금수강산’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바다와 육지가 처음 만나는 곳이기에 내 마음도 덩달아 숙연해진다.


어저께 저녁, 이곳 땅끝마을에 도착하여 바닷가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마을에는 모텔과 민박, 식당, 주차장과 관광시설이 들어차 있어 사람들로 붐비는 여느 도회지 같다. 고즈넉한 어촌 풍경을 상상하고 왔는데 토착민들이 살았던 흔적도, 시골 마을에 흔히 있는 살림집도 찾아보기 어렵다. 해물해장국으로 이른 조반을 먹고 땅끝을 찾아 길을 나섰다. 가는 길은 해변에 있어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돈다. 평지라 걷기 편하고 기분이 상쾌하다. 전망대로 향하는 모노레일 탑승 구역을 지나 오솔길을 이십여 분 걸어가면 바닷물이 찰랑이는 육지의 끝이 보이고, 그 위에 땅끝탑이 있다.


탑으로 향하는 나무 계단을 내려가는데 조금 전 마을에서 만난 다른 일행들과 마주쳤다. 나를 알아보고 “구경 잘하고 가세요” 하기에 “모두 다 가버리면 제 사진은 누가 찍어 줘요?” 하며 농담을 걸었더니 아래에 몇 사람 두고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너스레를 떤다. 내려가 보니 과연 한 가족과 청년 둘이 벌써 와 있다. 어머니에게서 이곳 이야기를 전해 듣던 아이들은 한반도 조각물이 거꾸로 서 있는 걸 무척 신기해한다. 나는 청년들에게 사진 몇 장을 부탁했다. 뱃머리처럼 생긴 조형물 끝에서 영화 <타이타닉>의 주인공이 된 듯 두 팔을 활짝 펴고 시원한 해풍을 맞았다. 심호흡하는 내 가슴에 화사한 햇볕이 우수수 내려앉는다. 자연을 벗 삼아 배를 타고 먼 항해를 시작하는 기분이다.


땅끝은 육지로 가는 시발점이자 바다로 나아가는 출발선이다. 그러기에 땅의 끝은 세상의 중심이지 결코 끝이 아니다. 간밤에도 으스름한 달밤이 지나고 여명이 깃드는 새벽녘까지 땅끝에는 어둠 속에서 적멸(寂滅)의 공포감이 엄습해 왔을 것이다. 그렇다고 땅끝은 절대 위축되거나 바다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의연히 밝아오는 새 아침 맞을 준비를 할 뿐이다. 땅끝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사자봉은 발밑에 있는 가녀린 땅을 지키려고 용맹스럽게 우뚝 서 있다. 고독하지만 억겁의 세월에도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버티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가상하다. 그 덕에 짓궂은 풍랑도 비켜가니 땅끝은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한 것이리라.


지나온 날을 돌아보면 내가 머물던 곳이 땅끝이었던 적이 참 많았다. 한 가지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장애가 닥치고 그것을 이겨내면 새로운 문제가 일어나곤 했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서면 어디로 가야할 지 암담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용기를 가지고 지혜를 다하면 새로운 길이 열리는 법이다. 나에게 땅끝은 인생의 전환점이자 또 하나의 희망이었다.


이처럼 땅끝에서는 비록 외롭고 힘들었지만 그곳을 떠날 때마다 더 성숙해지고, 더 원만해지고, 세상을 더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할 기회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어느 성직자는 ‘자기의 때에 맞는 아름다움을 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이마에 주름이 지고 흰머리가 많아질수록 마음은 따뜻해지고, 교회의 성화(聖畵)처럼 내면의 빛이 밖으로 드러나는 인생을 살고 싶다. 그래야 지난 삶에 후회가 없고 언젠가 닥치는 죽음도 평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위기의 순간을 슬기롭게 이겨내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다.


땅끝탑을 돌아 나오니 아내가 입구 근처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반색하며 나를 맞는다. 아내는 무릎이 아파 나와 동행하지 못했다. 대뜸 “많이 기다렸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그런다. 아내는 내가 걱정스럽기도 하고, 땅끝처럼 혼자 있어 무척 외로웠나 보다. 하마터면 바닷가에 처연히 홀로 선 망부석이 될 뻔 했다. 절경을 함께 보지 못해 내 마음도 아프다. 아내는 평소에 하지 않던 내 팔짱을 끼며 걷는다. 나는 아내 어깨를 꼭 감싸주었다. 해남의 땅끝은 우리 부부의 사랑을 키워 준 행복의 시발점이 되었다.


땅끝을 보고 올라가는 길은 그냥 돌아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마음으로 새 생활을 시작하는 출발선이다. 이런저런 상념 끝에 미래에 대한 꿈도 생겼다. 이것이 바로 천리 길을 달려 땅끝을 찾은 보람이요 결실이다. 그래서 모두가 땅끝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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