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현 칼럼] 피아노


수필가 김국현(金國鉉)


추석날 큰아들 집에 모처럼 가족들이 모였다. 저녁을 먹고 나니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손녀가 피아노를 친다.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이다. 몇 달 동안 연습한 솜씨를 앙증맞은 두 손으로 뽐내 보인다. 피아노는 나에게 추억의 악기이자 동경의 대상이다. 고등학교 2학년 음악 시간에 피아노 실기시험이 있었다. 과제로 주어진 곡은 연습곡인 바이엘 46번이었다. 내 순서가 되어 피아노 건반 위에 두 손을 올려놓는 순간 두런거리던 친구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차분하게 시작하여 악보에 따라 연주를 무난히 마쳤다. 반에서 두 손으로 곡을 연주해보인 학생은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 당시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했는데, 안집의 대문 옆 문간방에 풍금이 있어서 방과 후 근 한 달 동안 열심히 연습했다. 지금도 한 반 친구들이 나를 만나면 그때 그 기억을 되새겨 주곤 한다.


그 곡을 유튜브로 들었다. 내가 연주하던 그때의 숨소리와 손가락 놀림이 세월을 가로질러 초로(草露)에 묻힌 나에게 풋풋한 추억으로 전해온다. 이 곡은 후반부에 잠시 변화되는 부분을 빼면 사분의사 박자의 비슷한 멜로디가 반복되면서 곡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며칠 전, 비가 오던 아침나절에 러시아의 작곡가 야로슬라브 니키틴의 피아노곡 <비의 왈츠(Waltz in the Rain)>를 감상했다. 피아노 건반 소리 하나하나가 빗방울처럼 내 가슴 위로 떨어진다. 악보에 따라 연주자가 손가락 끝을 고부려 두드리는 건반이 고요한 내 마음을 톡톡 건드린다. 피아노 음률이 그토록 정겨울 수 없다. 곡을 듣고 있노라면 빗소리와 함께 비 내리는 정경이 연상된다. 비는 바깥에서 오지만 빗소리는 가슴속을 흘러내려 내 안으로 깊숙이 스며든다.


그런데 그 곡은 예전에 내가 배운 연습곡의 연주 패턴과 유사하다. 연주자의 왼손은 사분의사 박자의 반주를 반복해서 이어가고 오른손은 멜로디를 맡아서 분위기를 이끈다. 이 곡처럼 단순하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를 가진 피아노곡 중에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1악장과 <비창> 2악장, 쇼팽의 <녹턴(Nocturne)> 2번곡은 내가 특히 좋아하는 것들이다. 이처럼 복잡하지 않고 기교도 별로 없기에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명곡들이 많이 있다.


피아노곡은 왼손이 맡은 낮은음자리와 오른손으로 치는 높은음자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멋진 화음을 만들어낸다. 낮은음자리는 무게감 있게 전체 곡조를 받쳐주고 높은음자리는 멜로디를 따라 건반 위를 자유롭게 들락거린다. 마음의 혼돈이나 격정을 표현할 때 왼손이 높은음자리에까지 넘나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때도 오른손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대신하지는 않고 금세 평정을 되찾아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만약 왼손이 자신이 맡은 곡조가 단조롭고 재미가 없다고 푸념하면서 돌출 행동을 하면 둘 사이의 화음이 어긋나 좋은 곡이 탄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관계를 구성하는 양쪽이 각자의 역할을 다하면서 서로 화합하면 지극히 아름다워 보이는 게 있다. 부부의 존재가 그렇다. 남편이나 아내가 상대편을 응원하고 뒷받침해주면 가정은 평안하고 행복해진다. 요즘은 세태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지만 가정에 안과 밖의 일은 엄연히 구분된다. 부부 모두가 세상일에 중심을 두면 가정은 뒷전이다. 어느 한 사람은 조력자로서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세심하게 챙겨야 다른 한쪽이 안심하고 바깥일에 매진할 수 있다. 성악의 음역 중 베이스는 테너와 소프라노가 맡은 멜로디를 받쳐줌으로 합창에 힘을 싣고 화합의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우리 가락 중에 판소리하는 소리꾼 곁에는 늘 고수(鼓手)가 있다. 그들은 장구와 북을 치거나 추임새를 하면서 창의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운다. 소리꾼은 신바람이 나면 덩실덩실 춤도 춘다. 어느 누가 베이스나 고수의 역할이 작다고 할 것인가.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 일에 맞장구치며 은근히 도움 주는 일을 기꺼이 해낸다. 웬만해서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고 존재감이 없어도 자부심을 잃는 법이 없다. 그런 왼손의 영역이 사라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할까. 이것이 우리가 인생이나 사회의 조력자들을 소중하고 고맙게 여겨야 하는 까닭이다. 지금 내 앞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손녀는 양쪽 손의 어울림과 단순함의 미학을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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