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현 칼럼] 꽃보다 단풍


수필가 김국현(金國鉉)


곤지암 인근의 화담숲에서 가을을 맞았다. 꽃이 단풍이고 단풍이 꽃이었다. 어쩌면 단풍이 꽃보다 아름다웠다. 화담숲은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결실이다. 동산에서 자라던 수목의 풍광을 살리면서 그 사이로 작은 화단을 조성하여 초화(草花) 정원과 하경(夏景) 정원, 이끼원 등을 꾸몄다. 화담숲에는 모두 400여 종의 식물들이 자라는데, 그 중 수국과 국화와 구절초가 가을꽃의 명맥을 잇고 있다. 언덕배기에 형형색색의 국화를 가꾸고 오솔길을 따라 하얀빛이 영롱한 구절초를 심은 정원수의 마음이란 봄에 핀 꽃이 금세 지는 게 서운하여 그 때의 아쉬움을 달래고 싶은 까닭이리라.


가을 단풍 속에 있노라니 봄이 언제 왔는지 까마득하여 기억이 가물거린다. 군데군데 피어나는 들꽃이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갑기 그지없다. 작은 마디마다 뿌리를 내밀어 돌담을 타고 오르거나 전나무 줄기를 따라 올라가던 담쟁이덩굴도 널찍한 이파리가 하나같이 홍조 띤 얼굴을 하고 있다. 자신의 생존을 담벼락과 나무줄기에 의존하고 있어 부끄러운 것인가. 곁눈질하며 숨고 싶지만 어디로도 몸 하나 숨길 데가 없다. 어쩌면 아무 생각 없이 계절을 즐기며 주변과 동화되려는 떳떳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벚나무는 꽃이 예쁜 나무였다. 이른 봄 흰색 비단 가루를 지천으로 뿌려놓은 듯 화사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가을에 물든 잎이 꽃보다 예쁘다. 봄에 꽃 피웠던 시절을 못 잊어 겨울이 오기 전에 다시금 온 몸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것이리라. 그러기에 벚나무는 인생의 황혼으로 접어드는 나에게 용기와 도전의 마음을 북돋운다. 서리를 맞으면 붉어진다는 낙상홍은 또 어떤가. 핏빛처럼 붉디붉은 이파리는 남다른 열정으로 세상을 뜨겁게 달구었다.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기에 꽃이 피는 봄과 사뭇 다르다. 봄은 자신감을 가지고 아름다움을 마음껏 드러내는 젊은 아가씨 같다. 꽃들은 다른 꽃을 시샘도 곧잘 한다. 하지만 가을은 갈색과 옅은 노란색으로 물들어 점잖으면서도 마음을 내려놓은 나이든 아저씨 모습이다. 가을은 이기적이거나 질투하지 않고 봄의 화사함을 돋보이게 하려고 자신은 보일 수 있는 만큼만 변색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봄은 희망의 상징이고 가을은 지난 추억에 대한 그리움의 계절이다.


며칠 뒤 자연 속에서 익어가는 가을이 또 보고 싶어 설악의 오색을 찾았다. 모두가 대자연이 마련한 미인 대회에 나와 맵시를 뽐내느라 한창이다. 나뭇잎들은 서로 화합하여 멋진 색의 조화를 이루었다. 단풍으로 물든 설악은 바깥에서 보아도 좋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속살이 제대로 보인다. 아름다운 것은 가까이에서 봐야 더 예쁘다. 가을 속의 나무는 해마다 이맘때면 방문객들의 찬사에 상관치 않고 같은 모습으로 온 산을 물들인다. 그러니 단풍의 품성과 자태는 혼자 있어도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옛 선비를 닮았다. 


가을은 캔버스에 갖가지 색의 물감을 점점이 뿌렸다. 소나무의 녹색과 바위의 회색 바탕에 붉은색, 노란색, 갈색을 적절히 배합하여 수많은 수채화를 그렸다. 그중에도 주인공은 단풍나무와 개옻나무, 고로쇠와 참나무가 단연 으뜸이다. 이파리에 검은 점이 생기고 간간히 벌레가 먹기도 했지만 약점이 오히려 돋보이는 것은 아름다움을 시샘당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가을은 기대보다 훨씬 깊었다. 산은 가을 속으로 깊숙이 잠겨 다가오는 겨울 준비에 한창이다. 나무들은 풍미했던 지난 세월의 흔적을 잊고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자신을 털어낸다. 깊은 산은 죽음과 출산의 역사가 되돌이표처럼 일어나는 삶의 현장이다. 마치 새로운 탄생을 숙명처럼 여기고 이전보다 더욱 정결하고 강인해질 거라는 믿음 하나로 온 몸을 마음껏 불살랐다. 단풍이 깊어질수록 세월 속의 나 자신도 익어가니 이것도 성장의 축복이라 위안을 삼는다.


전망 좋은 바위에 걸터앉아 있노라면 나도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산에 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 맑은 햇살을 맞고 낮에는 개울물에 물장구치고 저녁에는 노랑할미새와 박새처럼 푸른 하늘을 날고 싶다. 청산은 나를 보고 물처럼 바람처럼 티 없이 살라는 나옹선사의 시를 읊는 사이 하늘에 한 떼의 새털구름이 둥실 떠올랐다. 문득 단풍잎에서 향기가 난다. 빨간 단풍나무 잎은 달콤한 향기를 뿜어내고 노란색 생강나무 이파리에서는 생강냄새가 난다.


단풍은 보이는 대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다. 나무는 흙에서 태동을 시작하지만 바람과 공기와 물과 햇빛이 어울린 자연의 걸작이다. 나무들이 자연이 잉태한 선물이듯 단풍으로 물든 나뭇잎은 자연이 인간을 향한 사랑의 표시다. 산에는 버섯, 버찌, 도토리, 밤, 인동초와 조릿대가 즐비하고 수십 억 년의 생존 역사를 가진 이끼도 응달진 바위나 길섶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대자연의 모두가 아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피부로 느끼는 것만 알아볼 뿐이다. 한없이 웅장하고 경이로운 대자연의 신비를 어느 누가 깨달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내 곁에 오색 단풍이 흠뻑 든 숲과 초원이 있고 자연을 이토록 아름답게 가꾸는 가을 속에 내가 있기에 요즘은 살맛이 난다.                      


글/김국현 전 한국지방재정공제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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