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현 칼럼] 억새의 노래


수필가 김국현(金國鉉)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면서 어떠한 역경이나 환경도 흔쾌히 포용하는 삶은 아름답다. 거기다 곁을 지키는 이웃과 오롯이 어울리며 지낸다면 더욱 갸륵하고 훌륭하다. 산과 바다의 고장인 강원도 양양의 제1경은 남대천 생태공원이다. 그곳은 해마다 시월이면 연어들이 산란을 위해 회귀하는 생의 마지막 서식지로, 지금은 개천을 따라 길고 넓은 행렬의 억새와 갈대가 장관을 이룬다. 그들은 참으로 좋은 터를 잡았다. 산이나 들에서 외롭게 자라기보다 가까이 물이 있어 사시사철 목이 마르지 않을 터이다. 밭을 가로지르는 탐방 길로 들어서니 어린 억새가 옹기종기 모여 마중을 나와 있고 조금 큰 억새들은 뒤에서 손을 흔들어 보인다. 소슬바람 한 줄기에 은빛 물결이 인다. 바람이 조금만 세차게 불어도 출렁이는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그들은 유연하고 가는 허리를 가졌기에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부러지는 법이 없다. 

 “사그락 사그락, 스슥 스슥, 삭삭”억새는 가만히 있다가 바람이 불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소리가 난다.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뿐 어떤 소리도 귀에 거슬리거나 거추장스럽지 않다. 오히려 마음에 평안을 얻고 동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길가의 벤치에 앉아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노라니 억새들이 무언가 속삭이는 듯하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어 그들의 대화를 몰래 엿듣는다. 잘 생긴 억새 하나가 “넘어질 것 같잖아, 밀지마.”라고 하니 뒤에 있는 억새가 “그래 알았어. 바람이 불어 그러는 걸 어떡해.” 한다. 옆에 있는 억새도 “간지러워, 간질이지마.”라고 말하는 듯하다. 간간히 가냘픈 웃음소리도 들린다. 바람이 반대로 불면 허허 하며 고개를 쳐들지만 곧바로 원래대로 돌아선다.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니 활짝 핀 꽃으로 무리를 짓고 있는 억새밭을 만났다. “훠어이 훠어이 우리가 가는 길은 아름다워라. 우리의 꿈은 사랑과 행복이라네.” 억새들의 소리가 합창이 되어 개천을 따라 하늘로 날아간다. 나는 그들이 내는 소리를 ‘억새의 노래’라 부르기로 했다.   



한쪽에는 억새가 갈대를 만났다. 같은 모습으로 한 방향을 향하고 서 있다. 갈대가 색깔도 다르고 조금 더 커 보이지만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쉬지 않고 소곤거린다. 그들은 분명 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비록 모양과 생태는 다르지만 다정한 이웃임이 분명하다. 같은 집단에서도 감정이 상하고 생각이 다르면 돌아서기 쉬운 세상인데, 자연은 화합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실천해 보인다.  돌아오는 길목에서 만난 지체 장애아의 어머니는 아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하다. 사진을 요리조리 찍어주며 “아이구 잘 찍혔네. 멋지게 나왔어.”라며 대견스러워 한다. 아들도 무척이나 행복해 보인다. 초로의 부부 두 쌍이 나에게 카메라를 맡기며 “우리가 오랜만에 만났어요. 기념사진 잘 찍어주세요.”라며 포즈를 한다. 바짝 다가가 붙어 앉은 모습이 무척 다정스럽다. 연인들끼리 손을 잡고 걷거나 사진을 찍으며 쉬지 않고 웃고 떠드는 탐방객 모두가 마음도 영혼도 순수하기 그지없다. 오랫동안 그리던 장소를 우연히 발견한 듯 온전히 동심으로 돌아갔다. 억새 숲과 갈대밭은 이처럼 사랑과 우정을 나누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사람들이 길을 내고 칸을 지웠지만 억새와 갈대는 주어진 터에 만족하며 그 안에서 번식과 성장을 거듭하니 이토록 아름다운 숲을 조성할 수 있었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이룬 결실이다. 광야에서 자유롭게 자라지 못한다고 원망하거나 신세를 한탄하며 지냈다면 이처럼 튼실하게 잘 크지 못했을 것이다. 고개를 숙인 모습은 또 어떤가. 가을에 피는 꽃 중에 백일홍과 코스모스와 국화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고 해바라기는 머리가 무거워서, 봄에 피는 할미꽃은 허리가 약해져서 고개를 숙인다. 하지만 억새나 갈대는 허리가 아픈 것도 아닌 듯싶은데 무슨 까닭에 고개를 숙이고 있을까. 다소곳한 이유는 바람에 순응하고 다순 햇살을 기다리며 그들의 고마움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석양 무렵, 노을을 등지고 선 억새와 갈대를 바라보며 나도 어느덧 그들의 마음을 닮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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