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현 칼럼] 나의 행복론

수필가 김국현(金國鉉)


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온다. 늘 앞 베란다 창문만 열고 지내다가 오늘은 부엌 쪽 문을 열었더니 서늘한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집안으로 은근슬쩍 뛰어든다. 거실과 방을 기웃거리다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맞장구치며 한바탕 놀고는 뒤따르는 바람에 떠밀려 슬며시 사라진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어느 산 속 오솔길의 벤치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열어 둔 창문 사이로 푸른 산과 구름도 또렷이 보인다. 아! 행복하다. 내가 집에 머무는 것 자체로 행복감을 느낀 게 언제였던가. 


시인이자 소설가인 헤르만 헷세는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포와 희망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고, 감정이 완벽하게 현재의 상태여야 한다고 했다. 오늘처럼 바람 한 점으로 행복을 느끼는 것은 과거나 미래에 대한 회한과 두려움 없이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있기에 가능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산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을 벗어나면 행복할 거라 믿고, 실업자는 버젓한 회사에 취직하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목적을 이룬다고 반드시 행복한 건 아니다. 만족하지 못하니 그런 것이다. 어느 아파트 경비원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주민의 행복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며 그들을 돕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표정이 무척 밝아졌다고 한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게 자신이 행복한 비결인 셈이다. 


내가 즐겨 다니는 산책길은 도심 속의 외딴 시골길 같다. 탄천 둔치와 도로 사이에 숲길을 내고 바닥에 가마니를 깔았다. 길 양 옆으로 나무가 우거져 계절마다 색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요즘처럼 신록의 계절이면 초목들이 싱그럽고 푸르러 걸음에 힘이 절로 난다. 오늘은 돌계단 사이에 핀 노란 들꽃을 보았다. 지난봄 어느 날인가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계단에 떨어진 뒤 회오리바람 한줄기에 돌 사이 벌어진 틈새로 굴렀다가 몇 톨 안 되는 흙에 간신히 뿌리를 내렸으리라. 돌 틈 사이를 비집고 나오느라 허리가 굽고 이파리 하나 자라게 할 겨를도 없이 꽃을 피우는 소망을 이루었다. 행복은 그냥 오는 게 아니다. 끊임없는 노력과 성취에 대한 의지가 조화롭게 버텨 주어야 한다. 가녀린 들꽃에 내 모습이 투영된다. 나와 들꽃의 만남은 마치 지친 내 영혼을 거울 속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가족은 희망이자 행복 그 자체였다. 그들이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이 있어 내 삶이 풍요롭고 살아갈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의 행복은 공짜가 없었다. 기쁨 뒤에는 시련과 고난의 그림자가 드리우곤 했다. 어느 순간 가족은 내 삶의 멍에이고 평생 져야 할 짐이 되었다. 그 짐이 있기에 나는 매사 조심하게 되고 등과 허리에 힘줄이 생겼다. 암울한 순간이 지나가면 여지없이 이전보다 더 좋은 여건이 만들어졌고, 그건 또 다른 기쁨이 되었다. 나에게 행복은 진흙탕 속에서 송이송이 피어나는 연꽃 같았다. 


수필집을 몇 권 냈다. 세상에서 비할 데 없는 기쁨을 누렸다. 글을 완성할 때마다 자수(刺繡) 놓을 때 느끼는 여인들의 성취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진정한 행복은 누가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몸부림치는 간절함이 있고 뜨거운 가슴과 눈물이 있어야 한다.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꿈이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꿈꾸는 자가 인생을 멋지게 사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나는 꿈꾸는 자가 되고 싶었고, 어느 한 순간도 꿈을 잃고 산 적이 없다. 


주례가 있던 날, 멋진 넥타이에 밝은 옷을 차려 입고 나왔다. 여의나루역은 나에게 색다른 기쁨을 안겨주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여행 온 젊은이들이 내게 버스 터미널 가는 길을 물어보았다. 마침 여유 시간이 있어서 메모장에 약도를 그려가며 안내해 주었다. 그들의 인사를 받고 나도 따라 미소로 화답했다.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지하철 갈아타는 법을 물어봐서 세세히 알려주었다. 태국인 여행객들이었다. 관광 안내원이 된 듯싶어 가슴이 뛰었다. 이것이 행복인가. 행복한 마음을 가지면 또 다른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어찌 보면 행복은 착각과 환상의 결과물이다. 순간의 착각 속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행복도 유한하고 불행도 유한하니 이 둘은 잠시 왔다가 금세 사라질 뿐이다. 어느 문학 동호인 이야기다.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는데 뒤에서 역무원이 불렀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돌아보니 역무원은 “지공노(地空老)*신가 본 데 너무 젊어 보여서…”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실은 개찰할 때 뭔가 잘못된 게 있어 불렀단다. 어쨌든 그분은 이 말 한마디로 하루 종일 행복했었다. 행복이란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다. 어린아이처럼 무엇이든 단순하게 생각하고, 현재에 충실하면서 오감(五感)과 마음을 활짝 열고 살 일이다. 

                                                  

*지공노: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노인’을 일컫는 약자

                                                       

저작권자 © NEWS REPORT(www.news-report.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0




상호명 : 뉴스리포트 NEWS REPORT 사업자번호 : 728-34-00398  발행인 : 정혜미 편집인 : 정연우 청소년보호책임자: 정연우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5-16(국회대로 66길 23) 산정빌딩 7층 ㅣ 이메일 : korea_newsreport@naver.com

대표전화 : 02-761-5501 ㅣ 팩스 : 02-6004-5930 ㅣ 등록번호 : 서울, 아 05234 등록일 : 2018.06.04

뉴스리포트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와 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18 뉴스리포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