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원 MG원세종새마을금고 이사장, '무호적자 호적만들어주기운동' 선도

온라인뉴스팀
2019-07-14


[뉴스리포트=온라인뉴스팀] 국내 최초로 인권의 중요성에 대해 경종을 울린 이성원 이사장은 세종시 조치원 출생으로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목숨 바친 철도영웅 故이영복 선생(국가유공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친의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중학교 1학년 때 6.25사변이 발발해 정변의 소용돌이 속에 험난한 피난길을 다녔다고 회고했다. 졸업 후 조치원역에서 근무하던 중 4·19혁명이 발발했고, 청소년 선도에 열중할 때 5·16혁명이 일어나, 혁명의 1등 공신인 선배가 중앙정보부요원으로 발탁하겠다는 것도 극구 사양하고 봉사에 열중했다. 한평생 국가 보조금 한 푼 받지 않고 땅 팔아 순수하게 봉사했지만 12·12정변의 혼란한 틈을 타 허위모략에 대전형무소까지 다녀오는 등 핍박의 세월도 견뎌냈다. 하지만 그는 거리의 천사를 선도하고, 빈농의 자녀들에게 가축을 기르게 했으며, ‘무호적자 호적만들어주기운동’을 펼쳐온 지난 세월을 보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1960년대, 희망원생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 .(사진=이성원)


거리의 천사들의 따뜻한 보금자리 ‘희망원’ 설립


“1959년, 군 전역후 고향에 돌아왔을 때 거리에는 부모님을 잃고 방황하는 아이들이 가득했습니다. 행인들의 냉랭한 시선과 동냥에 익숙한 청소년들이었죠. 부모의 사랑을 받을 나이에 거리를 떠돌며 앵벌이를 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청소년들을 선도해 건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키우고 싶다는 각오를 다지게 됐습니다.”

이성원 이사장은 조치원 철도역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며 청소년을 위한 봉사도 본격화했다. 역 주위를 배회하며 앵벌이를 하고, 다리 밑에서 생활하는 부랑아들의 친구가 되어 진심을 전했다. 이성원 이사장은 부랑아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우려한 부모님의 성화로 쫓겨나듯 서울로 갔다. 한양탄광회사에 취직해서 근무하다가 고교시절 인연을 맺은 신생 지역사회학교 김일남 교장을 만나 무료로 야학 봉사를 하기 위해 탄광회사도 그만두었다.

“대학생 봉사자들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조치원에서 불우한 학생들을 돕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신생학교 봉사를 정리하고 조치원으로 귀향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역 주변에서 깡통을 차고 다니며 동냥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후 역 대합실에 상담소를 개설해 청소년 상담을 했으며, 점차 일회적인 선도는 한계가 있음을 판단하고, 그들을 위한 따뜻한 안식처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성원 이사장은 부모님을 설득해 1964년 부친 소유의 땅에 희망원을 건립했다. 부모 형제를 잃고 떠도는 부랑아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그는 청주무심천교, 대전 목척교, 천안 남천교, 예산 예산천교, 홍성 광천교, 광천 옹암교, 대천 대천교 등 냄새나는 다리 밑에서 생활하는 걸인소굴을 찾아다니면서 ‘얻어먹던 깡통을 버리고 우리의 가난을 우리가 몰아내자’고 외치며 자립의식을 심어주었다. 희망원 건립 후 500여 명의 원생들을 돌보면서 사회에 필요한 인재로 거듭날 수 있도록 농사짓기, 철사 수공품 만들기, 운전기술 등 자활교육에 집중했다. 국가 보조금 없이 순수 사재를 털어 희망원을 운영해온 그의 열정에 희망원생들은 훌륭하게 성장해 사회 일원이 됐다. 이성원 이사장은 “땅 팔고, 양복을 팔아서 힘들게 희망원을 이끌어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보람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그의 도움을 받은 희망원생들은 여전히 그를 원장님으로 부르며 아버지처럼 따른다. 사회로부터 외면받았던 그들을 자립할 수 있도록 지도한 이성원 이사장의 은덕을 잊지 않았다. 또한 이성원 이사장은 농촌 청소년운동의 일환으로 4H구락부 운동과 가축보급 운동도 펼쳤으며, 학교순회 선도 교육에도 적극 나섰다. 1970년대에는 국내 최초 민간인 주도 합동결혼식을 열어 1,500여 명의 하객들의 축하 속 희망원 부부들을 위해 뜻깊은 자리를 마련했다.


1960년대 무호적자 호적만들어주기 운동 펼친 이성원 이사장.(사진=이성원)


무호적자 호적만들어주기 운동 전국적으로 펼쳐

"제가 ‘무호적자 호적 만들기 캠페인’을 전국적으로 펼쳤던 1960년대, 무호적자 수가 무려 12만 명이었습니다. 병역기피자나 범법자 4만 명을 제외한 8만 명은 갖가지 사연으로 호적을 갖지 못해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권리나 의무를 행사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습니다.”

무호적자들은 학교 교육은 물론 취업을 해서 경제활동도 할 수도 없었다. 병역의 의무는 물론결혼을 해도 혼인신고도 못했으며, 자식을 낳아도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다. 이 이사장은 인간의 기본권인 호적이 없음으로써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그들의 비참한 삶을 가엽게 여기고, 1965년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에 무호적자 호적 만들어주기 운동을 주창했다. 각 언론사뿐 아니라, 대통령, 대법원장, 국무총리, 내무부장관, 서울시장 등에게 호소문을 발송하고, 직접 플랜카드를 메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호적만들어 주기 캠페인을 펼쳤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위대한 업적이다. 민간이 시도하기에는 온갖 시련이 있었지만, 이성원 이사장은 오직 무적자들에게 인권을 찾아주기 위한 일념으로 혼신을 다했다. 이렇듯 그의 희생으로 무호적자들을 사회 안전망에 들여놓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결과, 법무부로 하여금 무적자들을 구제하는 방안이 발표됐다. 또 이성원 이사장은 호적정리와 더불어 국내 주민등록증 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과거 서울 사람들에게는 시민증, 타 도민들에게는 도민증을 부여해 지역을 구분했으나 1968년 10월 말부터 이를 폐지하고, 전 국민들에게 12자리의 주민등록증이 발급되는 등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데 공헌했다는 평가다. 이성원 이사장은 무호적자 호적만들어주기 캠페인을 선도한 공로로 법무부로부터 ‘인권 옹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58년의 봉사 인생 담은 기록 사진집 탄생

이성원 이사장은 지난해 12월 10일 ‘인권의 날’을 기념해 58년 봉사 발자취를 담은 기록 사진집 <그늘진 곳에 희망을 보급한 58년의 찬란한 기록>을 출간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 책은 지난 60년간 이성원 이사장이 소장해온 수천 장의 사진 중 180장의 보석 같은 사진을 담았으며, 흑백 아날로그의 감성이 담긴 빛바랜 사진들을 한 컷 한 컷 보정해 흑백 아날로그 의 감동을 인쇄로 구현했다.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시대별로 정리해 인간 이성원의 인생 전시장이 영화 필름처럼 펼쳐지듯 역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눔과 봉사로 아름다운 인생길을 걸어온 이성원 이사장의 봉사정신과 희망원생들을 향한 따뜻한 감성이 담겨있다.

“희망원생 중에는 조치원역 주변에서 택시운전을 하고, 구두닦이를 하면서 발전적인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 병환으로 고통받는 희망원생이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아 평안한 가정을 꾸려나가길 간절히 바랍니다.”

나눔과 배려를 통해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이성원 이사장의 위대한 발자취를 기리며, 팔순의 나이에도 지치지 않는 봉사 열정과 숭고한 인류애가 희망의 새 시대를 여는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길 바란다. 국가를 빛낸 인권운동가로서, 세계무대의 주인공으로 빛나길 바란다.



A Father of Children Wandering Street During Korean War!

1st Human Rights Activist in Korea Leading Movement of Making Family Register


A director Sungwon Lee of Korean Federation of Community Credit Cooperative is the great man lightning up Sejong-si. Based on his heart-warming humanity, he spread the importance of human rights for the first time in Korea and enhanced social consciousness. For last 58 years, he has been practicing service activities for disadvantaged groups. Director Lee was born in Jichiwon, Sejong Metropolitan Autonomous City in 1937 and he is the oldest son of Yongbok Lee who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and devoted life for protecting liberal democracy. Also, director Lee is a human rights activist devoting for the country and people.


In 1960, Lee was a public servant at Jochiwon Station. Then, he left Jochiwon Station to help unfortunate youths wandering on the street after lost their parents, brothers, and siblings due to the Korean War. He visited beggars living under bridges such as Cheongju MuShimcheon Bridge, Daejeon Mokcheon Bridge, Yesan Yesancheon Bridge, Hongseong Gwangcheon Bridge, Gwangcheon Ongam Brdige, and Daecheon Daecheon Bridge and he spread the sense of independence by shouting out ‘Throw away your can and let’s overcome the poverty ourselves’. In 1964, Lee founded center for children on the street in his father’s land. At the center, he cared for 500 children and taught them farming, wire handicraft skills, driving skills to help them grow into talents needed in the society.


Furthermore, Lee practiced national movement of ‘Making Family Register for People Without Family Register’ and he is recorded as the 1st human rights activist in Korea helping 80,000 people. He led a national street campaign for people without family register who were suffering from infringement of human rights. He also sent letter of appeal to the president, Chief Justice, Minister of Home Affairs, Minister of Health and Social Affairs, and each press. He was the first civilian to alarm the human rights awareness on people without family register and to lead national human rights movement.


Based on Lee’s efforts for helping people without family register to be included in social safety net and fulfill rights and duty as a citizen, Ministry of Justice announced the measure for helping people without family register and such measure had significant influence in family register organization and ID card issuance. Especially, while people’s region was classified into province and city, the 12-digit ID card was issued to people in the end of October, 1968. Lee made huge contribution in making a fair society.


Although Lee is in old age of 82, he is still devoting himself for community service and revitalizing community. Lee said “When I think of past, I had pains and difficulties. However, seeing my students getting married and living happily, I feel rewarding”. He also said that “I would like to continue my community service as long as possible”.


Lee has been emphasizing love for humanity, contributing to development of community, and sharing warm hearts for his whole life. His great contribution deserves the credit for enhancing national prestige as the human rights activist.


저작권자 © NEWS REPORT(www.news-report.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0




상호명 : 뉴스리포트 NEWS REPORT 사업자번호 : 728-34-00398  발행인 : 정서우 편집인 : 장찬주  청소년보호책임자: 정서우

주소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15-16(국회대로 66길 23) 산정빌딩 7층 ㅣ 이메일 : korea_newsreport@naver.com

대표전화 : 02-761-5501 ㅣ 팩스 : 02-6004-5930 ㅣ 등록번호 : 서울, 아 05234 등록일 : 2018.06.04

뉴스리포트의 모든 콘텐츠(영상, 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와 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18 뉴스리포트. ALL RIGHTS RESERVED.